Couple & Relationship

[푸른나래] Schrodinger whale, the after.

쇼우소예 2016. 9. 8. 20:46




[안녕히계세요. 나중에 놀러올게요.]


그것은 병원에서 보낸 6년간을 제외하고 태어나서 줄곧 의지하고 사랑해왔던 집을, 고아원을 떠나오며 마지막으로 적어낸 인삿말이었다.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아껴주고, 마지막까지 사랑과 기도를 보내주신 원장선생님과 어린 동생들을 뒤로하며 나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아 입술을 더 꾹 앙다물어야만 했다. 자살미수로 미뤄졌던 퇴원이후 두어달 남짓, 부모님과 마찬가지인 원장님을, 모든것을 거부한채 틀어박혀있던 시간 동안에도 꾸준히 저를 챙겨주셨던 그 마음이 너무나 감사하고 죄송해서, 기뻐서. 잊었다 생각했었던, 다시 떠오른 감정들이 울렁여서 이미 그 앞에서 한번 눈물을 보였음에도 또 새어나오는것을 고아원 모퉁이조차 보이지 않게 될 즈음에야 떨궈내고 말았다. 다시 하나하나 느껴지게 된 감정이라는 것은, 정말로 종잡을 수 없는것이어서-.


*


진정하라며 사다준 시원한 음료를 양 손가득 쥐고 빨대를 문 채,  그의 새하얀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기를 한참. 길디 긴 정적의 끝에 퐁 하고 입에서 빨대를 떼어내는 것으로 공기가 흔들렸다. 테이블위에 올려놓았던 보드위로 움직이는 작은 손. 그것에 집중하는 보랏빛 시선.


[이제 괜찮아.]


짧은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사내는 안도하는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눈가가 발개진채로 물끄러미 저를 올려다보는 나래를 온화하게 마주 바라보며 사내도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럼 일어날까요? 오늘은 그만 쉬는게 좋을 것 같으니까."


나래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냥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가 일어나기 편하도록 의자를 잡아당겨주는 자세는 분명 누가 보아도 훌륭한 신사였다. 다 마시지 못한 음료를 그대로 손에 쥔 채 사내의 에스코트를 따라 -손은 잡지 못했지만, 그래도 얼추 모양새는 비슷하게 갖추었다.- 나래는 천천히 카페를 벗어났다.


노을이 내려앉는 골목골목을 지나 감귤색이 짙은 다홍색이 되었을 즈음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인가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 변두리의 집터. 번듯한 이층집에 마당이 넓게 딸린 훌륭한 주택이었다. 겨우 두 사람이 지내기엔 조금 과하게 넓고 비싸기까지 했지만,


"어때, 마음에 들어요?"

[응, 예뻐.]


인간들의 경제관념을 잘 알지 못하는 하나와, 오랫동안 병원에만 있어 세상물정에 둔해진 나래가 그 점을 깨달을 수 있을리 없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 이게 얼마나 과한 부자스러움인지 깨달은 나래가 이사하자고 실랑이를 벌이게 될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채 두 사람은 마당 안으로 발을 들였다. 깔끔한 하얀색 벽돌이 나래는 퍽 마음에 들었다. 내부도 무척이나 넓고 깨끗해서, 고아원 동생들이 다같이 지내도 될 것 같아, 그렇게 생각했다. 나래는, 2층의 전망좋은 방을 자신의 방으로 가지게 되었다. 늘 동생들과 부대껴자거나 병실에서만 지내던 나래에게 난생 처음 생긴 자신만의 방. 기쁜기색을 미처 감추지 못하는것이 오히려 하나를 더 기쁘게했다. 옆방은 하나의 방을, 1층의 빈 방은 서재를 하기로 하고도 2층에 손님방이 남을정도로 넓은 집, 너른 거실 카펫위에 나란히 엎드려 두 사람은 도란도란히 이야기했다.


[어차피 진도 따라가기 힘들테니까, 맛보기로 1년정도만 학교에 다녀보고싶어.]

"그래, 내일은 교복을 맞추러가요. 입고싶다고 했었죠?"

[여름에 바다에 가자. 여기선 고래로 변할 수 없으니까.]

"그러고보니 나래가 인어가 되는것도 볼 수 있겠네요. 분명 무척 예쁠거야."

[당번은 어떻게 정할까? 나, 요리는 다시 배워야겠지만 청소랑 빨래는 고아원에서 제일 잘 했으니까.]

"돌아가면서 하는걸로 해요. 칼하고 불 쓸때는 꼭 허락맡고 하는걸로. 위험하니까요."


어느덧 검보랏빛 짙은 어둠이 창밖에 내려앉았음도 눈치채지 못한채 거실 벽난로 불빛을 등불삼아 두 사람은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 시작될, 새로운 이야기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