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역원의 밤은 아주 깊고, 어둡고, 그리고 조용했다. 남아있는 이라고는 문간을 지키는 병사들과 자신, 그리고 타닥이는 소리를 내며 달빛 하나 새어들어오지 않는 사역원 안을 비추는 불꽃 뿐이었다. 마지막 정리를 끝내고, 슬슬 사역원 서편의 헐소청으로 가려는 걸음이었다. 사역원을 벗어나려는 걸음 끝자락에, 솟대 위로 일렁이는 새빨간 불빛에 잠시 시선을 빼았기었나 싶었다. 일순, 붉은 불꽃 너머로 비추인 푸른 빛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그리 여기었을 터였다. 새까만 밤하늘 아래에, 도깨비불 같이 퍼어런 것이 아른였다. 궁의 횃불을 헛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보아도 그것은 헛 것이 아니었다. 불꽃처럼 일렁인다 생각했던 것은 저를 오롯 바라보고 있는 시선이었다. 그것은, 밝은 낮 하늘아래 어디서도 보기 힘든 색이기도 했다. 드물게 바다 건너 서역에서 오는 이들의 눈동자가 저러했지 싶었다. 아니, 그보다 더 선연하게 일렁이는 색인 것 같기도 했다.
"여기 침입ㅈ...!"
"-쉿. 뭔가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소저."
반사적으로 지키고 있을 포졸을 부르려던 목소리가, 큼직한 손에 가려지며 목 안으로 삼켜졌다. 머리 하나 위에서 떨어지는 목소리가 지독히 낮고 부드러워서 등줄기에 소름이 쭈뼛 돋아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여느 멀끔한 사내들은 덜 여문 과실처럼 여겨져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저였건만, 입을 막은 손을 내칠 생각 조차 하지 못하고 홀린 듯 바라보게 되는 또렷한 이목구비가, 잘 벼린 쇳날같은 턱선과 코의 흐름이, 저를 삼킬듯 혹은 홀릴듯 바라보는 푸른 불꽃이 정말로 도깨비불 처럼만 여겨졌다.
"...오해라 하시려거든 수상쩍게 말을 가로막은 이 손에 대한 해명부터 하심은 어떠신지요. 첩자이십니까, 암자이십니까. 아니면 이 어둑서니에 쥐새끼처럼 다니는 것에 무어라 변명을 하시겠습니까."
허나 마냥 그렇게 넋을 잃고 있어서는 백가의 도화가 아닐 터였다. 호신용으로 늘 품고 다니던 단도의 끝이 도포 안 자락에서 비져나와 그의 복부를 겨누었다. 도깨비는 도깨비고, 수상한것은 수상한 것이었으니까. 냉정하게 갈무리 된 목소리가 잘 벼린 칼날처럼 밤공기를 가로질렀다.
"암자도, 첩자도 아닐뿐더러... 그저 이 늦은 시간에 고생하는 분들을 애먼 오해로 헛걸음 하시게 하기에 죄송스럽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밤눈이 어두워 길을 잘못 든 신출내기 관리일 뿐입니다, 허니 이 살벌한 쇳자락을 좀 치워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소저?"
퍽 유들유들하고 태연자약한 목소리였다. 온전히 진실인지, 거짓인지 선 자리에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사실 눈썰미 만으로 어느정도 꿰어 볼 수 없는 것도 아니었건만, 그러지 못하고 그 태연자약한 말의 나열에 칼 끝을 거두었던것은 어쩌면, 정말로 도깨비불에 홀린 탓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자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느쪽이든, 굳이 이 어둠 속에서 몸싸움을 일으키는 것 또한 그다지 영리한 생각은 아니기도 했으니. 휘어져 흔들리는 도깨비불은 끊임없이 눈 앞을 어지럽혔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선 만큼 걸음 앞의 그가 허상처럼 보여졌고, 물러선 만큼의 현실로 돌아온 것 처럼 느껴졌다. 넘어서는 안되는 세계와 현실의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발 아래에 그어진 것만 같았다.
"...허면, 길 헤메지 마시고 저기 포졸분께 길이라도 여쭈시지요."
더 오래 그를 보아선 안될 것 같다는 기묘한 감각에 그대로 등을 돌려 어둠 너머로 도깨비불이 사라지도록 말없이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으나, 그러지 아니했다. 그래서는 안 될것만 같았기에 그랬다. 지친 몸을 뉘이려 헐소청으로 가는 내내, 몇번이고 지금이 깨어있는 것인지, 꿈인지 스스로 헷갈리는 것만 같았다. 진짜 도깨비에게 홀린 것인지, 피곤해서 허깨비를 본 것인지, 혹은 이도저도 아닌 온전한 현실인지. 하지만 곧 깨달을 터였다.
이른 새벽빛에 눈을 뜨고, 다시 낮달이 저물고, 다시 어둑서니 날이 기울면,
이번엔 부러 저를 찾아온 퍼어런 도깨비에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고,
이 또한 꿈이 아니라고,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고.
자신은 하염없이 그 푸른 불꽃에 홀리고 말았다고.
그 모든 것들을 깨달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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