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의 연인의 이후로 당분간은 사랑을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었다. 첫 사랑은 지독하게 끔찍한 상흔을 남겼고, 두번째 사랑은 그것을 아물게는 해 주었지만 그저 거기까지일 뿐인 관계였다. 사랑이긴 했지만 연인의 애정이 아닌 친구사이의 우정에서 나아가지 못할 벽을 가진 관계. 그래서 어쩌면 연애에 조금 지쳤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단순히 그간의 연애 전과보다는 막 성인이 되어 자신의 일에 적응해가는 것이 바빠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 어쨌든, 21살의 여름날 저는 생각했다. 당분간은 사랑을 하지 않을거라고.
하지만 누군가가 그랬던가, 사람의 마음은 통제되지 않는 것이라고.
우연은 필연이 되어, 가랑비 방울이 나도 모르게 옷을 적시듯,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주춧돌을 움푹하게 패어내듯, 그렇게 또 다른 인연에 얽혀버리고 말 것임을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작은 토끼도, 털을 세운 고양이도 알 지 못했을 터였다. 아니, 어느 유능한 예언가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라는건, 관계라는건 늘 그렇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일들 뿐이니.
"여긴 예약한 손님만 받는 곳인데."
"저리가, 도움같은거 필요 없으니까!"
"... ...레이첼 J. 시크힐.."
잔뜩 날을 세우던 그 날의 목소리들이 선연했다. 그 목소리들은 점차, 점차 경계를 풀어내리고 부드러워져갔다.
언제 그렇게 털을 곤두세웠었냐는 듯, 경계를 했었냐는 듯,
"제나베스?"
"그래, 내가 첫번째가 아니라는거네 지금,"
"...나랑 같이 있어줄거지?"
그저 애정을 갈구했고 갈구해서 상처받았을뿐인, 그래서 웅크리고 있었을 뿐인 고양이었음을 너는 고맙게도 드러내주었고 보여내주었다. 아마 그래서, 그래서 더욱 더 너를 사랑스럽게 느끼고 애정을 품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비록 처음 시작은 진짜로 애정따위는 생길 일 없을거란 되도않은 호언장담으로 겉치레뿐인 연애를 하자는 계약이었지만, 그러한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린듯 속절없이 네게 잠겨들고 말았다. 뺨을타고, 손끝을 타고 흘러내려 스쳐지나가기만 할 거라 생각했던 빗방울이 소맷자락부터 서서히, 아주 서서히,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너 라는 이름 하나에 젖어버리고 젖어버리다 결국 물에 빠지고 말았음을 눈치채지도 못하게 그렇게 너는 다가왔고, 나를 삼켜갔다.
그렇게 작은 토끼는,
그렇게 나는,
당분간은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사랑을, 나는 어느 순간 너와 하고 있었다.
.
.
.
깨달은 순간은 이미 끝이 다가올 즈음이었음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니, 애당초 너와는 기한을 정해둔 '계약'으로 얽혀진 관계였고 그 끝은 어느새 손을 뻗지 않아도 닿을만치 가까이, 가까이 다가와 이제는 한 걸음 간격만을 남겨둔 채로 우리는 마주하고있었다. 너는 어떤 기분일까, 레이첼? 너는 나를 사랑했니? 단순히 계약을 넘어서, 그저 겉치레뿐이던 시작을 지나서, 나와 같은 마음이 되었을까? 이제와서 그것을 물은들 소용 없겠지, 왜냐면 너는, 이미 전부 결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고집스럽게 결단내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의 결심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게되었으니까. 너를 너무 많이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레이첼.
그 결심한 얼굴 아래로 어쩐지 울 것 같은 눈이 보이는건 그저 내 기분탓이었으면 좋겠어.
결국 또 아파하게 될 내일이 있다면 나는 억지로라도 이 모든걸 어그러트리고 틀어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르거든.
" ......후회해? 나랑 사귀었던거, 지금 이런 끝을 정해놓은거. "
적어도 나는, 꽤...아니 무척 많이 후회 돼.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그런 조항같은거 넣지 말걸 그랬다고말야.
"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후회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 그랬으면 좋겠어. "
이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내 진심.
너를 꺾을 수 없다면, 차라리 네가 덜 아프기를 바라.
아, 그냥 나도 같이 주문을 쏜다고 할 걸 그랬나?
" 계약은 여기서 끝이고, 나는 잊어버릴테지만 말야?"
잊어버릴테지만, 그래도 말이지,
" 혹여라도 다시 기억하게 된다면, 그리고 변한게 없다면,"
어제까지도 내가 이젠 당연한 일과처럼 네 작업실에 놀러갔듯이 그렇게,
" 피하지 말고 널 찾아가는걸 반겨주면 좋겠어."
그래도 이왕이면, 네가 아파하지 않고 새로운 행복을,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 있으면 더 좋겠어.
아, 하지만 이건 아직은 조금 질투나니까 말하지 않을래.
" 안녕, 레이첼언니."
네 표정이 어떤지 잘 보이지 않는건 아마, 네가 나를 향해 지팡이를 들고 있기 때문일테지.
-Obliviate.
안녕, 레이첼.
안녕, 내 세번째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xNc5wcKd8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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