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의 연인의 이후로 당분간은 사랑을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었다. 첫 사랑은 지독하게 끔찍한 상흔을 남겼고, 두번째 사랑은 그것을 아물게는 해 주었지만 그저 거기까지일 뿐인 관계였다. 사랑이긴 했지만 연인의 애정이 아닌 친구사이의 우정에서 나아가지 못할 벽을 가진 관계. 그래서 어쩌면 연애에 조금 지쳤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아니, 단순히 그간의 연애 전과보다는 막 성인이 되어 자신의 일에 적응해가는 것이 바빠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 어쨌든, 21살의 여름날 저는 생각했다. 당분간은 사랑을 하지 않을거라고.

 

 하지만 누군가가 그랬던가, 사람의 마음은 통제되지 않는 것이라고.

 

우연은 필연이 되어, 가랑비 방울이 나도 모르게 옷을 적시듯,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주춧돌을 움푹하게 패어내듯, 그렇게 또 다른 인연에 얽혀버리고 말 것임을 예상한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작은 토끼도, 털을 세운 고양이도 알 지 못했을 터였다. 아니, 어느 유능한 예언가 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라는건, 관계라는건 늘 그렇게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일들 뿐이니.

 

"여긴 예약한 손님만 받는 곳인데."

"저리가, 도움같은거 필요 없으니까!"

"... ...레이첼 J. 시크힐.."

 

 잔뜩 날을 세우던 그 날의 목소리들이 선연했다. 그 목소리들은 점차, 점차 경계를 풀어내리고 부드러워져갔다.

언제 그렇게 털을 곤두세웠었냐는 듯, 경계를 했었냐는 듯,

 

"제나베스?"

"그래, 내가 첫번째가 아니라는거네 지금,"

"...나랑 같이 있어줄거지?"

 

 그저 애정을 갈구했고 갈구해서 상처받았을뿐인, 그래서 웅크리고 있었을 뿐인 고양이었음을 너는 고맙게도 드러내주었고 보여내주었다. 아마 그래서, 그래서 더욱 더 너를 사랑스럽게 느끼고 애정을 품을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비록 처음 시작은 진짜로 애정따위는 생길 일 없을거란 되도않은 호언장담으로 겉치레뿐인 연애를 하자는 계약이었지만, 그러한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린듯 속절없이 네게 잠겨들고 말았다. 뺨을타고, 손끝을 타고 흘러내려 스쳐지나가기만 할 거라 생각했던 빗방울이 소맷자락부터 서서히, 아주 서서히,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전부 너 라는 이름 하나에 젖어버리고 젖어버리다 결국 물에 빠지고 말았음을 눈치채지도 못하게 그렇게 너는 다가왔고, 나를 삼켜갔다. 

 

그렇게 작은 토끼는,

그렇게 나는,

당분간은 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사랑을, 나는 어느 순간 너와 하고 있었다.

 

.

.

.

 

깨달은 순간은 이미 끝이 다가올 즈음이었음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으니, 애당초 너와는 기한을 정해둔 '계약'으로 얽혀진 관계였고 그 끝은 어느새 손을 뻗지 않아도 닿을만치 가까이, 가까이 다가와 이제는 한 걸음 간격만을 남겨둔 채로 우리는 마주하고있었다. 너는 어떤 기분일까, 레이첼? 너는 나를 사랑했니? 단순히 계약을 넘어서, 그저 겉치레뿐이던 시작을 지나서, 나와 같은 마음이 되었을까? 이제와서 그것을 물은들 소용 없겠지, 왜냐면 너는, 이미 전부 결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고집스럽게 결단내린 얼굴을 하고 있으면 너의 결심을 꺾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도 너무나 잘 알게되었으니까. 너를 너무 많이 알게 되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레이첼. 

그 결심한 얼굴 아래로 어쩐지 울 것 같은 눈이 보이는건 그저 내 기분탓이었으면 좋겠어.

결국 또 아파하게 될 내일이 있다면 나는 억지로라도 이 모든걸 어그러트리고 틀어버리고 싶어질지도 모르거든.

 

" ......후회해? 나랑 사귀었던거, 지금 이런 끝을 정해놓은거. "

 

적어도 나는, 꽤...아니 무척 많이 후회 돼.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그런 조항같은거 넣지 말걸 그랬다고말야.

 

"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후회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 그랬으면 좋겠어. "

 

이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내 진심.

너를 꺾을 수 없다면, 차라리 네가 덜 아프기를 바라. 

아, 그냥 나도 같이 주문을 쏜다고 할 걸 그랬나?

 

" 계약은 여기서 끝이고, 나는 잊어버릴테지만 말야?"

 

잊어버릴테지만, 그래도 말이지,

 

" 혹여라도 다시 기억하게 된다면, 그리고 변한게 없다면,"

 

어제까지도 내가 이젠 당연한 일과처럼 네 작업실에 놀러갔듯이 그렇게,

 

" 피하지 말고 널 찾아가는걸 반겨주면 좋겠어."

 

그래도 이왕이면, 네가 아파하지 않고 새로운 행복을,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 있으면 더 좋겠어.

아, 하지만 이건 아직은 조금 질투나니까 말하지 않을래.

 

" 안녕, 레이첼언니."

 

네 표정이 어떤지 잘 보이지 않는건 아마, 네가 나를 향해 지팡이를 들고 있기 때문일테지.

 

-Obliviate.

 

안녕, 레이첼.

안녕, 내 세번째 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xNc5wcKd8M8

 

 

 

 

 

 

 

Posted by 쇼우소예 :

바넷사목떡

2018. 6. 15. 23:05 from 카테고리 없음


Posted by 쇼우소예 :






 뼛속까지 녹여버릴 듯한 더위가 몇 걸음 물러선 자리에 높은 가을하늘이 성큼 다가왔다. 파릇하던 나무들도 하나 둘 붉고 노란색으로 단장을 시작하는 계절이 이제는 뚜렷하게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었다. 고교시절이었다면 뜨거웠던 인터하이의 반성회를 끝내고 내년을 기약하며 재정비와 트레이닝으로 만전을 기하고 있을 시즌이었다. 대학교 2학년의 가을, 고교시절과는 달리 수많은 여름의 대회들을 끝내고도 11월에 있을 투르 드 오키나와의 준비로 페달을 밟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2학기에 들어서서 다시 쏟아지기 시작한 강의와 과제 또한 게을리 하지 않는 대신, 하코네 로드부의 OB로써 그 곳을 찾아가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주에 2-3회 이상은 만나던 연인과는 화상통화가 아니고서는 보기 힘들게 되었다. 꼬박 2년. 그리고 그 날로 부터 세번째의 가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아주 많은것들이 바뀌어 버렸다. 많은것들이 바뀌어버렸고, 그리고 여전히 바뀌고 있으며 흘러가고 있는 가을날이었다.



"네, 벌써 그렇게 됐어요. 한 여섯시~일곱시만 되어도 한밤중마냥 깜깜해지는게 아, 이제 여름이 다 갔구나- 싶다니까요."



 어린 시절,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우연히 보았던 로드바이크에 고스란히 마음을 빼앗긴 후 수년. 여전히 제 마음속에는 그것이 가장 소중한 꿈이고 목표로 확고부동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고교시절 인터하이 3연패의 상처를 딛고 대학 로드부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각종 대회에서 착실하게 실적을 올리며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몇번인가 프로 로드팀의 스카우트도 받았었다. 학부 내에서는 교수님들에게 예쁨받는 착실한 학생이었고, 고교시절 후배들과도 여전히 교류하며 친목을 돈독히 하고 있었다. 타학교의 라이벌이었던 친우들과의 연락도 여전했다. 이나데라 마사토의 대학생활은 모든것이 완벽했다. 모든것이, 아니. 단 한가지를 뺀 모든 것이.


 그가 슈쨩의 제의를 받아 함께 해외로 나가기 직전 커플폰으로 맞췄던 스마트폰 너머로 언제고 들어도 부족한 나즉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목소리이건만 바로 옆에서 속삭여 주는 것 처럼 늘 자신을 간질거리게 만들어주는 목소리. 주말이라고 늦잠이라도 잤는지 아직 잠기운이 묻어나는게 귀여워 절로 입가에 잔 웃음이 맺히고 마는 것을 감출 생각따윈 하지 않았다. 8시간의 시차만큼 몸은 멀어졌지만, 멀어진 시간도 퍽 길어져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통 마음이 멀어지리라고는 제 심장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래도 역시.


아, 아쉽다.


 내심,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목소리가 입 밖에까지 밀려 튀어나갈 것 만 같아 전화 너머로 들리지 않게 침을 삼키며 내리 눌렀다. 역시 그와 몸이 멀다는 것은, 저보다 약간 더 큰 손을 잡을 수 없고,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매를 마주 볼 수 없고, 따뜻한 입술이 마주 닿을 수 없고, 그 너른 등을 쓰다듬을 수 없으며 맨 살의 온기를 오롯이 나눌 수 없음이어서, 그런 많은 것들을 참아야 한 다는 것은 더없이, 너무나도 큰 아쉬움으로 빚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역시 선뜻, 먼저 해외에 나가서 고생하고 있는 그에게 그런 투정을 할 수는 없어 꾹 삼키곤 했었다. 고작 일년이 채 안 되었는데도, 이렇게나 아쉬워지고 마는 것은 그만큼 식지않는 깊은 애정을 품고 있기 때문이겠지. 지난 여름 내내 몇번이나 삼켜내고 참아내던 아쉬움, 달리말하면 그리움이었던 그 감정을 이번엔 아주 슬쩍, 조심스레 입 밖으로 내어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말로만으로 끝나게 될 애닳음이 아니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조금 이르게 조기졸업을 하게 될 것 같아요. 물론 스카우트가 들어온 것도 있고-"


 여태토록 조곤조곤히 일상의 이야기를 하던 것 처럼, 평이하고 단조로운 어투로 다소 놀랄만한 뉴스를 읊어내는 것에 오히려 전화 너머 상대의 목소리가 더 놀란듯이 들려왔다. 소리죽인 웃음이 새어나와, 아마 지금 집 앞에서 쌍둥이 동생이라도 마주치면 퍽 바보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고 놀림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하고 올해, 대회에서 쌓아둔 실적이랑 매 학기 수석 장학금을 놓치지 않을 정도의 학생이란 것에서 가산점을 받아 남은 2년치의 학점을 채우지 않아도 괜찮을거란 이야기를 교수님께 들었어요. 그래서 아마, 11월에 있을 투르 드 오키나와를 끝내고 나면."


 이제 겨우 가을이 시작했을 뿐인데, 벌써 여름을 저만치 미리 세워둔 봄하늘이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 만 같았다. 서늘한 공기의 어둑한 밤하늘이 2년전의 것과 꼭 닮아 있어 별빛 아롱이는 그 맑은 하늘같은 미소를 만면에 머금었다.


"넘어가게 될 것 같아요. 영국으로. 올 연말에는."


 나의 꿈을 향해서, 그리고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함께 하지 못했던 지난 새해를, 이번에는 저 바다 너머 다른나라에서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어서, 그 입술의 열기를, 손끝의 뜨거움을 더 이상 아쉬워하지 않아도 될 겨울이 어서 제게로 달려 오기를. 겨울이 제게 달려오는 만큼, 저는 그에게로 달려갈 수 있을테니까.

고즈넉한 가을밤 하늘 아래, 같은 하늘 아래 저 바다너머로 이르게도 겨울을 기약하는 사랑을 속삭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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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미포 1927

조기졸업같은건 그냥 픽션입니다 적당히 그러려니하고 넘겨주세요...<

잇마사 800일이래 세상 잇마사 사랑해 영원히 러브해...ㅠㅠㅠㅠㅠㅠㅠ앤오님 제가 매니매니 사랑하ㅏ는거 아시죠

정말 여태토록 잇마사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3주년 4주년을 넘어 천년만년 사랑하자 잇마사...!!!!!!!

Posted by 쇼우소예 :

 




forest tumbl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마법과 마법이 맞부딪혀 일어난 폭발과도 같은 빛, 빛 너머에서 흔들리던 검은 머리카락의 슬리데린 7학년, 그리고 어둠이 내려 앉아있는 호그와트의 복도 천장. 입학한지 아직 일 년을 채 채우지 못한 신입생 앨리스 베로니카 아스트라는, 주문의 빛이 사그라듦과 동시에 시야가 점멸했었다. 분명 그랬었고, 그대로 고스란히 차가운 바닥에서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은 채 누워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잠들 듯 사그라들었던 심연 속에서 끌어올려 진 건, 저를 감싼 온기와 미미한 흔들림 때문이었다.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전신의 통증도 다시 생생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생채기가 난 쓰라림, 디핀도따위의 주문에 베인 화끈거림, 핏자국, 멍 자국. 헐렁한 교복 사이사이로 드러난 어린아이의 여린 피부가 보기 안타까울 만치 엉망이었고, 엉망인 만큼 아팠다. 하지만 아픈 것보다도 저는, 무거운 눈꺼풀 새로 비친 유리 색에 시선이 팔려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곳에 있을 리 없는데. 하지만, 저토록 말갛고 아름답게 빛나는 유리 색 눈동자는 오직 그 하나뿐인걸.

 정신이 몽롱해 목소리를 조금도 낼 수 없어 입술만 달싹이다 말았지만, 점차 맑아지는 시야에 들어오는 고운 밀색의 블론드 머리카락은, 언제 어디서고 기품을 잃지 않는 수려한 이목구비는, 저를 안아 올리고 있는 이 단단한 팔은 분명 칼립 비셥, 그가 아닐 수 없었다. 


*


 미미한 흔들림과 전신의 통증이 버거워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는, 난생 처음 보는 맑은 기운이 맴도는 숲속이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아직 래번클로 휴게실의 천장의 색을 띠고 있었고, 이따금 요정일까 싶은 빛무리가 보이는 것이 이질적이었다. 딱 한 번 작은 사고로 래빗을 찾아 얕은 부분까지 들어가 봤던 호그와트의 금지된 숲은 무척이나 음침하고 스산했으며 그 흐름을 알 수 없는 기운이 뒤틀려 섞여 있는 느낌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었다. 분명하게도 금지된 숲의 분위기와 상반된 이곳이 그 숲의 일부일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올 수 있는 결론은 하나, 이곳이 '학교 밖의 어딘가' 라고 밖에는 볼 수가 없었다.

 저를 어딘가에 편히 뉘어놓은 커다란 손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고 있었다. 아, 아까의 흐릿한 정신에 보았던 것은 당신이 맞았구나. 하지만 어째서지? 당신은 데스이터파의 학생들을 이끌고 싸우고 있어야 하지 않아? 충실한 충견을 앞에 세워두고, 그렇게 군림하고 있어야 할 선배인데, 분명히도 우리는 적대관계였는데, 어째서, 왜, 불사조 기사단의 이름을 달고 데스이터의 이름을 단 선배의 맞은편에 서서 싸운 나를 보살펴주고 있는 거야? 수많은 의문은 뱃속에서부터 빙빙 돌아 결국 칼립, 그를 부르는 단 한마디만으로 바뀌어서 나왔다. 이내, 부름에 대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은 대신 잠시간의 정적 끝에 그의 입에서 첫 말이 흘러나왔다. 그 또한, 저도 바로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아가씨는, 집에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나?"


 기묘한 물음이었다. 이 상황에 나오기엔 맞지 않는 듯, 헌데도 그가 말하니 자연스러운 순서인 듯 느껴지는 그런 말. 저는 생각을 하는 척, 입을 다물고 상체를 일으켰다. 그저 운을 띄우듯 나온 조그마한 글쎄, 라는 중얼거림이 그에게 닿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저가 궁금한 것은, 알고 싶은 것은.


"...강아지는 유기하고 온 거야?"


 그의 종잡을 수 없는 표정을 살피며 의문문으로 물었지만, 사실 어느 정도의 추론은 끝낸 지 오래였다. 충견. 그의 의지는 일절 상관없이 오직 제 뜻대로 수족이 되던 존재가 곁에 있지 않고, 기절했었던 저를 데리고 학교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은 전쟁이 종막을 맞이했고 또 아마, 충견의 배신- 혹은 그의 손으로 잘라내 버린 것, 둘 중 하나겠지. 그렇지 않고는 그 어떠한 것도 설명이 되지 않는걸. 그럼에도 그에게 굳이 묻는다는 것은 그의 목소리로, 말로써 분명히 하고 싶었고, 어느 측이 승리했던 1학년이고 아직 어리기에 정상참작을 받을 수 있는 저보다도 그의 위험성이 더 크다는걸 알고 있기에 좀 더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싶었다. 그 역시 눈앞의 작은 소녀가 파악해놓고도 부러 되묻는 것을 아는지 대답을 가렸다. 입술 새에서 나온 나지막한 목소리는, 데스이터파 의 승리와 호그와트의 전쟁을 한 이들에게서 저의 기억을 지우고 나왔다는 것과 이대로 학교를 나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충견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자세한 것들이 생략되었지만 분명 그 또한 자신의 추론대로 일 것이 분명했다.

 어두운 숲속에서도 이른 아침 하늘, 한낮의 맑은 샘, 깨끗한 거울 유리처럼 빛나는 눈동자에는 말없이 그를 곧게 시선 하는 은색의 눈동자 한 쌍이 담겨있었다. 몇 초간의 정적 끝에, 그는 저에게 물었다.


" 나는 계속 아가씨와 다른 길을 갈 텐데, 나와 같은 짐을 짊어질 수 있겠어? -앨리스 베로니카 아스트라. "


 고작 며칠 전, 서로가 대립의 관계에 들어서기 전에 그가 저의 성을 떼고 퍼스트와 미들네임만을 불러주었던 때를 떠올렸다. 살아남길 바라, 간원의 키스를 네게 남겼을때 잡혔던 팔의 감각이, 가는 팔을 쥐었던 커다란 손의 온기가 떠올랐다. 그가 무어라 했었더라. ...아, 그래. '왜 하필 아가씨지?' 였었다. 왜, 하필. 어쩐지 저는 그 상황이 머글의 소설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장면과 닮아있다고 생각해서, 그 대사를 읊기도 했었다. 바라지 않았던, 원치 않았던 대립. 하지만 대립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상황들. 그는 뱀의 새끼로 자랐고, 저는 불사조의 새끼로 자랐기에, 그래서였을 뿐인 대립. 결국, 전쟁 내내 저는 그의 앞에서 단 한 번도 지팡이를 들 수 없었다. 부러 그를 피하였고, 그가 쓰러졌을 때 그 모르게 잠시 치료를 해주었을 뿐이었다. 그 또한 그러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분명히도 그를 공격할 수도, 그에게 대항해 싸울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의 길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전혀 다른 가치관의 길. 차별과 격차로 점철된 사상의 길. 오러인 마마와 대립하고야 말 수밖에 없는 길. 가족을 등지고, 소중한 이들을 등져야만 하는 그런 길. 

 자신이 버려야 할 것들과 함께 떠오른 것은 바로 직전까지의 전쟁. 호그와트라는 작은 장소에서 벌어진, 앞으로 일어날 마법 세계의 전쟁의 축소판과도 같은 그 항쟁에서 제가 보아온 것들. 각자의 정의에 따라 갈라진 학생들은, 자신의 정의를 쫓아 지팡이를 들었고, 서로에게 주문을 겨눴었다. 그것이 교수님일지라도, 동급생, 선후배, 친구, 형제자매일지라도 그들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전쟁의 시간이 이어져갈 동안, 눈에 보였던 모든 것들에 저는 분명히 환멸 느꼈었다. 옳은 정의, 차별을 반대하는 정의의 붉은 날개 아래에 불사조의 이름을 달고 싸우던 이들의 비겁함을, 멍청하고 저열한 싸움을. 그저 선(善)의 집단이라는 형편 좋은 허울을 걸치고 있을 뿐 전쟁 속에서 지팡이를 휘두르는 모습은 데스이터들과 다를 바 없는 무법자들의 모습에서 동지감도, 의무감도, 정의감도 느낄 수 없었다. 인적이 드문 복도 구석에 숨어 모든 싸움을 지켜보며 몇 번이고 생각했었다. 붉은 날개도, 죽음을 먹는 뱀도 결국 다를 바 없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차라리.


생각이 흐르고 흘러

결국 그 흐름이 도달한 곳은

날이 개고 있는 새벽하늘 끄트머리를 투영한듯한 유리 색 눈동자로.


 아직 어린아이의 것과 다름없는 자그마한 손이 제 팔을 잡아 쥐었던 커다란 손을 조심스럽게 마주 잡았다. 마치 그에게 간원의 키스를 할 때처럼, 커다란 손 하나를 양손으로 조심스레 붙잡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마주했다.


" 당신이 그것을 바란다면, 그 짐의 무게가 얼마가 되었든 간에 상관없이. "


문장의 사이에 쉼표를 찍어놓듯 잠시 숨을 고르고 -다만, 해야만 할 말들을 이어갔다.


" 나는 아직 어려. 고작 11살, 이제 겨우 호그와트의 한 학년을 마치기 직전인 신입생이야. 지금의 내가 선배의 손을 잡고 학교를 떠난다면, 고작 기초를 배웠을 뿐인 1학년은 결국 아무 쓸모 없는 말이 되어버리고 말 거야. 선배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선, 마땅한 지식과 실력을 갖춘 뒤여야 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주변 정리를 할 시간도 필요해."


 그에게는 분명, 지난겨울의 무도회에서 이야기했었다. 오러인, 순수혈통인 마마의 이야기를. 당신의 손을 잡는다는 것은 마마와 대립하게 된다는 이야기. 가면의 너머로 모른 척, 아닌 척 장난스러운 연기를 하며 추었던 왈츠 속에서 나눈 이야기를 그가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의남매로 있어 주기로 했던 마크오빠의 일도 알고 있을 터였다.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주변 정리에 대한 의미를 그는 알 것이었다. 그 자신도 주변 정리를 하고 호그와트를 나와버렸듯이, 저에게도 그런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편지를 보낸다든가, 방학 때 만나러 간다던 가를 지속한 채, 나는 호그와트에 남아서 더 배우고, 준비하고, 정리하고, 그리고 졸업을 하는 날, '칼립 비셥이 필요로 하는 것에 걸맞은 마녀'가 되어서 지팡이를 들고 싶어."


 당신과 대립하여서, 당신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눈을 감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것에 당신이 괴로워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그것이 낳아주고 길러준 가족을 등지고 나를 믿어주는 이들을 배반하는 일이 될지라도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각오한 채 그 손을 잡을 수도 있어. 사실은, 이미 한번 대립한 상황 속에서의 그 선연한 괴롭고도 답답한 감각을 지울 수 없어서, 저와의 대립을 바라지 않아 했던 듯한 그 잡아챔이 여태토록 생생해서, 그래서 더욱 그 손을 뿌리칠 수 없는 것도 있지만. 맹세하듯 내뱉은 말에 이어진 희미하게 지어지는 미소에 그가 무슨 생각을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퍽 기분 좋은 빛을 발하고 있는 듯해 보였다는 것 정도 뿐에는.

-깨뜨릴 수 없는 맹세를 나누고 싶어. 내가 방금 한 말들을 어기지 않을, 당신을 따라가겠다는 약속의 증표로.

 어둠 속에서 흐르는 가느다란 목소리에 뒤이어, 공기를 가르는 소리, 황금빛의 실이 반짝이는 형체가 환상처럼 짧은 순간 동안 스치고 사라져갔다. 호그와트로 돌아가는 포트기를 앞에 두고 조금 전까지의 분위기가 꿈결이었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고 평이한, 일상적인 목소리가 재잘이며 울려 퍼졌다. 편지할게. 카올도 건강히 잘 있다가 답장 전해주러 와야 해? 방학 때 봐, 선배. 그 말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래서 어쩐지 호그와트의 복도에서 나누는 대화인 것만 같이 들려왔다. 결국, 호그와트로 돌아가는 이는 단 한 명 뿐이었음에도.


 작은 여자아이가 사라진 숲속에서, 청년에 가까운 소년은 미련 없이 포트키를 없애고 저 또한 새까만 올빼미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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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x키x 그 이후.

공미포 3915

Posted by 쇼우소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