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오노] 구속하다 또는 구속되다
*설정날조주의
몽글몽글한 김이 욕탕 내부를 가득 들어채웠다. 그것 만으로도 모자란지, 자그만 체구 가득 하얀 거품이 덮어씌워져있어 오롯이 드러낸 까만 머리칼과 푸른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김과 거품사이에 뒤덮혀 그 작은 몸뚱아리가 감쪽같이 숨어버릴 것 만 같았다. 제대로 먹질 못했는지 삼시세끼 잘 먹고도 그다지 찌질 않는 저보다 마른몸이 조금 가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을 한 단 1초만에 스스로도 어이없단듯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가여워? 가엽다고? 노예들 몰골이 엉망진창인걸 하루이틀 본 것도 아닌데, 이런건 이미 제게 익숙한 광경인데. 그런데 어째서? 왜?
따뜻한 물의 온기에 꾸닥꾸닥 조는 동그란 머리통을 바라보며 그, 아라키타 야스토모는 짧지만 깊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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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키타 야스토모는 왕국 내에서 제일가는 노예 교관이었다. 말을 듣지 않는 노예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어주거나 밤시중용 노예들에게 방중술을 가르쳐주는, 귀족들의 의뢰를 받고 교육을하는 사람으로 왕국의 뒷면에선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능력이 있으나 그의 성질머리를 비유해 절대 그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들개,광견따위로 불리기도 하는 사내였다. 들리는 소문으론 그도 한때 노예였더라, 하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를 믿는 이는 실상 존재 하지 않았다. 그만큼 아라키타 야스토모라는 노예교관은 잔혹하고 난폭하며 노예를 사람취급하지 않는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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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라,아라키타상…?"
한 달째였다. 이 소심하고 어리바리하기 그지없는 녀석과 살게 된 지가. 아직도 잔뜩 겁을먹어 저를 부를 때면 더듬더듬거리면서도 병아리마냥 잘도 쫓아다니니 참 별난녀석이다 싶었다. 아니, 이런 녀석을 떼놓지 못하고 있는 자신도 별난것이려나. 문득, 녀석의 목에 걸려있는 노예의 구속구가 묘하게 시선에 걸렸다. 무심결에 구속구를 잡아채 제 앞에 끌어당겼다. 당연하게도 작은 녀석은 힘없이 켁켁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 코앞으로 끌려와 아둥거리며 금방 또 울 것 같은 얼굴을 해 보였다. 분명하게도 풍겨오는것은 한없이 약한 초식동물의 밍숭맹숭하기 그지없는 냄새. 처음 노예시장에서 맡았던 그 냄새였고 결코 변함도 없건만.
영 마땅찮은 기분에 켁켁거리는 아이를 놓아주고 매섭게 눈을 부라렸건만 아이는 언제나처럼 겁을 집어먹고 몸을 움츠리나 싶더니 이내 뭔가 퍼뜩 떠오른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언제 겁먹었냐는 듯 베시시 웃어보였다. 바뀌었다. 냄새가.
"그, 저번에 아라키타상이 주셨던 화분에서 새싹이 나서... 그래서 보여드리고 싶어,서... 아라키타상 말대로 했더니 엄청 씩씩한 떡잎이 나왔거든요! 역시 아라키타상은 굉장해요, 아는 것도 많고 강하고!"
초식동물의 밍숭맹숭한 냄새가 일순간 사라지고 반짝반짝하니 어디서 벌꿀이라도 가져다 놓은 듯한 단내가 풍겨오기 시작했다. 잔뜩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모습도 방금전까지의 부들거리던 모습과 천지차이였다. 하루에도 몇번씩, 냄새가 뒤바뀌는 별난녀석. 분명 귀찮은 타입이다. 엄청나게 귀찮아하는 타입임에 분명한데도 이렇게 녀석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고 있게 되는 것은, 이 녀석을 사놓고서 제 옆을, 제 뒤를 쫓아다니게끔놔두게 되 버리는 것은 도대체.
다시금 문득 시선이 닿은 아이의 구속구에 비친 제 얼굴 아래로 순간 자신이 구속구를 찬 것처럼 스쳐보인것은 신기루였을까.
어쩌면 자신은, 녀석을 구속하고 있다 여기면서도, 어쩌면은, 이미 자신이.